러시아 혁명사(1장-10장)

<차례>

저자 서문

1장: 러시아 사회발전의 특이성

2장: 전시의 짜르체제

3장: 노동자계급과 농민

4장: 짜르와 황후

5장: 무혈쿠데타에 대한 논의

6장: 구체제 멸망의 격심한 고통

7장: 5일간(1917년 2월 23일부터 27일까지)

8장: 누가 2월봉기를 지도했는가?

9장: 2월혁명의 역설

10장: 새로운 권력

저자 서문

1917년 첫 2개월 동안 러시아는 여전히 로마노프 왕조의 나라였다. 그러나 8개월 후 볼셰비키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1917년이 시작되었을 때 이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지도자들이 권좌에 올랐을 때 이들은 국가반역죄로 기소된 상태에 있었다. 역사상 이렇게 모든 일이 순식간에 바뀐 경우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1억5천만 인구의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어났다는 것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다. 1917년의 사건들에 대해 우리의 생각이 어떠하건 이것들을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다른 모든 역사서술과 마찬가지로 혁명역사의 서술은 무엇보다도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매우 불충분하다. 서술을 제대로 하자면 어떤 일이 왜 일어났으며 왜 이렇게만 일이 일어났는지 즉 그 이유와 필연이 명확히 설명되어야 한다. 역사 사건들을 일련의 모험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또 어떤 미리 정해진 도덕률에 따라 꿰어 맞추어서도 안된다. 이것들은 자신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 이 법칙을 밝히는 것이 역사서술자의 임무이다.

역사 사건에 대중이 직접 개입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혁명의 가장 명확한 특징이다. 평상시에는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국가가 인민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역사는 정치 전문가들 즉 왕, 각료, 관료, 의원, 기자 등에 의해 창조된다. 그러나 대중이 구체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 그러면 이들은 정치의 각축장에 자신들의 접근을 막는 장벽들을 부순다. 그리고 이것들을 뛰어 넘어 기존의 대표기구들을 쓸어 없애버린다. 그리고 스스로 개입하여 새로운 체제의 기초공사를 시작한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도덕가들의 판단에 맡겨두자. 다만 우리는 사건의 객관적 과정에 의해 주어진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이다. 우리에게 혁명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는 영역으로 힘있게 들어서는 역사이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사회에서 계급들은 서로 대항하며 투쟁한다. 그러나 혁명의 시작과 끝 사이에 도입되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와 계급적 기반의 변화들은 혁명의 전개과정 자체를 설명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혁명은 짧은 시차를 두고 오래된 제도들을 뒤집고 새로운 제도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들을 뒤집는다. 혁명 이전에 이미 형성된 계급들의 빠르고 강렬하고 격렬한 심리변화에 의해 혁명 사건들의 원동력이 직접 결정된다.

사회는 자신의 제도들을 기계공이 연장을 바꾸는 방식으로 필요에 따라 바꾸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와 반대로 사회는 자기에게 매달리는 제도들을 영원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수십 년 동안 진행되는 반체제 세력의 비판은 대중의 불만을 배출시키는 안전밸브에 불과하다. 이것은 사회구조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필요조건이다. 예를 들어 짜르체제에 대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비판이 원칙적으로 이와 같았다. 대중의 불만에 덮어 씌워진 보수주의의 멍에를 벗기고 대중을 봉기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정당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예외적인 조건들이 성립되어야 한다.

혁명 시기에는 대중의 견해와 정서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이 변화는 인간 심리의 융통성과 기동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깊이 뿌리 박힌 보수주의 심리로부터 나온다. 새로운 객관적 상황들이 재앙이 되어 인민의 머리 위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바로 그 순간까지 인간의 사상과 관계들은 고질적으로 객관적 상황에 뒤쳐져 있다. 바로 이 상황이 혁명 시기에 볼 수 있는 사상과 열정의 폭발적 운동을 창조한다. 이것은 경찰관의 눈에는 "선동가들"의 활동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대한 것을 배후에 깔고 있다.

대중은 사회 재건의 준비된 계획을 가지고 혁명에 돌입하지 않는다. 다만 구체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혁명에 돌입할 뿐이다. 계급 대중의 지도적 부위만이 정치 강령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도 혁명의 시험과 대중의 승인을 거쳐야한다. 혁명의 근본적 정치과정은 대중이 사회위기로부터 도출되는 문제들을 서서히 이해하는 데에 있다. 즉 연속적으로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면서 대중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는 데에 있다. 혁명의 각 단계들은 지도적 정당들의 변화에 의해서 확인되는데 정당 내의 더 과격한 분파가 항상 덜 과격한 분파를 밀치고 등장한다. 이것은 혁명운동의 파도가 객관적인 장애물에 부딪치지 않는 한 대중이 왼쪽으로 운동을 더욱더 압박하는 현상을 표현한다. 그런데 객관적 장애물이 혁명의 전진을 가로막을 때 반동이 시작된다. 즉 혁명 대중의 다양한 부위들이 상황 전개에 대해 실망감을 표출하고 혁명에 대한 환멸을 증대시킨다. 이와 함께 반혁명 세력의 입지가 강화된다. 최소한 이것이 과거 혁명들의 일반적 경향이다.

대중 자신의 정치적 과정들을 연구한 기초 위에서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정당들과 지도자들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혁명과정의 독립적 요인은 아닐지라도 매우 중요한 요인임에 틀림없다. 지도 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혁명 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 그러나 역시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고 증기에게 있듯이 혁명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혁명 시대에 나타나는 대중의 의식 변화를 연구하는 데 이런 저런 어려움이 등장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억압받는 계급들은 공장, 군대의 막사, 농촌의 마을, 도시의 거리 등 관심이 안가는 장소에서 역사를 만든다. 더욱이 이들은 사물들을 글로 적는 일에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사회적 갈등이 높은 시기에는 명상에 잠기고 반성할 여지가 거의 없다. 모든 뮤즈 여신들 특히 언론을 관장하는 인민 성향의 뮤즈 여신은 엉덩이가 튼튼하기는 해도 혁명이라는 썰매의 요동과 충격을 견디기 어렵다. 따라서 격동의 시기에는 글들이 남아나기 힘들다. 그러나 역사가의 상황이 가망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 기록들은 불완전하고 흩어져 있으며 우연히 여기저기에 발견된다. 그러나 벌어지는 사건들의 조명을 받아 이 단편적인 기록들은 숨겨진 역사과정의 방향과 리듬을 추측할 수 있게 만든다. 좋든 나쁘든 혁명정당은 대중 의식의 변화를 계산하여 전술을 수립한다. 볼셰비키주의의 역사는 이러한 계산이 거칠게나마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계산이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는 혁명 지도자에게 가능하다면 혁명이 지난 후 역사가가 이 계산을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대중의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념주의자들과 절충주의자들이 아무리 소동을 벌인들 의식은 객관적 조건들에 의해 결정된다. 러시아라는 나라, 그 경제와 계급들 그리고 그 국가기구를 형성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그리고 다른 국가들이 러시아에 가한 작용 속에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전제조건들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러시아라는 후진국이 노동계급을 권력의 주인으로 올려놓은 첫 나라라는 사실은 대단히 이해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이 후진국의 특이성 즉 이 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다른 점들 속에서 이 이해하기 힘든 현상을 해명해야 한다.

본 저서의 첫 몇 장들은 러시아 사회와 그 내부 세력들의 발전과정을 짧게나마 훑어볼 것이다. 이를 통해 러시아의 역사적 특이성과 이 특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상대적 비중이 다루어질 것이다. 이 첫 장들의 불가피한 도식적 서술 때문에 독자들이 이 책을 멀리하지 않기를 감히 희망한다. 본 저서를 계속 읽다 보면 러시아 내부 세력들을 살아 움직이는 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저서는 필자 개인의 회상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 과정에 필자가 참여했다 하더라도 엄격히 고증된 문서들에 기초하여 서술해야할 의무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술에 꼭 필요하다면 혁명 참가자인 필자는 제 3인칭으로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문학적 장치만이 아니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에 불가피하게 드러나는 주관적 목소리는 역사 저서에는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에 참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필자는 혁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투쟁에 참여한 세력들의 심리 뿐 아니라 사건들의 내적 관련들을 필자는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이 혜택은 하나의 조건이 지켜질 때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소한 사항이건 중요한 문제이건, 사실과 관련된 문제이건 행위의 동기와 정서의 문제이건, 필자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하나의 조건이다. 필자가 역사서술자라는 임무를 유념하는 한 이 조건이 지켜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필자의 정치적 입장이 또 하나의 문제로 남는다. 그러나 필자는 혁명에 참여했을 때나 역사서술자로 있는 지금이나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독자는 필자의 정치적 견해를 공유할 의무가 없다. 이 점을 필자는 전혀 숨기지 않겠다. 그러나 역사서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옹호해서는 안되며 내적 기초가 탄탄한 혁명의 실제과정에 대한 묘사가 되어야 한다고 독자가 요구할 권리는 없다. 역사서의 지면을 통해 역사 사건들이 완벽한 필연성을 가지고 전개될 때, 이 때만 역사서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소위 역사가의 "중립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중립성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해본 적이 없다. 혁명을 하나의 "덩어리" 즉 전체로 간주해야 한다는 자주 인용되는 끌레망쏘(역자 주: Georges Clemenceau,1841~1929, 프랑스 제 3 공화국의 수상.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수상직에 있었음. 제 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승리에 기여했으며 전후 베르사이유 조약을 기초함)의 말은 기껏해야 이 문제를 재치 있게 회피할 뿐이다. 각 세력들의 분리와 상호투쟁이 핵심인 혁명이라는 사물을 어떻게 하나의 덩어리로 간주할 수 있는가? 그의 경구는 부분적으로는 너무 주관이 강해 자기주장이 난무하는 역사서를 저술했던 자기 선조들이 부끄러워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선조들의 그늘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반동적 경향의 따라서 인기 있는 역사가 중의 하나가 마들렝(Madelin)이다. 그는 사교계 응접실에서 하는 것처럼 조국의 근대적 탄생을 가져온 프랑스 대혁명을 비방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가는 적에게 포위 당한 도시의 성벽 위에 서서 포위 당한 쪽과 포위한 쪽을 동시에 조망해야한다." 오직 이 방식을 통해서만 "화해적인 중립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자기가 성벽에 올라서서 두 적대 진영을 바라볼 때 반동세력의 정찰병으로서만 그렇게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가 과거 전쟁 중인 적대 진영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은 좋다. 그러나 혁명 시기에는 성벽 위에 올라서 있는 것 자체가 아주 위험하다. 더욱이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갈 경우 "화해적인 중립성"을 주창하는 자들은 보통 방안에 앉아서 어느 쪽이 이기는 지를 기다렸다가 이긴 쪽에 붙는 것이 보통이다.

진지하며 안목이 있는 독자는 이 위험천만한 중립성을 원치 않을 것이다. 이 중립성이라는 놈은 컵 밑바닥에는 반동적 성향의 증오심을 가득 가라앉힌 채 컵의 위쪽 부분에만 화해의 단맛을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놈이다. 현명한 독자는 차라리 과학적 양심을 원할 것이다. 이것은 공감과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사실들을 정직하게 연구하고 사실들 사이의 진정한 관련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사실들의 움직임을 통해 인과법칙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의 지지를 구한다. 이것이야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역사적 객관주의이며 그 자체로 충분한 역사서술 방식이다. 왜냐하면 역사서술자 자신의 좋은 의도는 자기만이 보증할 수 있는 반면 그의 노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역사과정 자체의 필연법칙은 모두에게 이 서술방식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본 저서를 위해 동원한 자료는 여러 정기간행물, 신문, 잡지, 회고록, 보고서 등이다. 이것들은 부분적으로는 원고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대다수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혁명역사연구소에서 간행한 것들이다. 본문에서 특정 출판물을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독자들을 귀찮게 할뿐이므로 생략했다. 필자가 특별히 자주 사용한 자료 가운데에는 집단적 역사서의 성격을 띤 저서가 있다. 두 권으로 구성된 [10월 혁명사에 대한 시론집](1927년, 모스크바-레닌그라드)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 저자들이 참여한 이 책의 각 부분들은 특별히 귀중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사실관계 자료들을 풍부히 포함하고 있다.

본 저서에 언급된 날짜들은 모두 구력에 의한 것이므로 국제적으로 그리고 현재 소련에서 사용되고 있는 신력보다 13일이 늦다. 혁명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력을 사용해야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했다. 물론 구력을 신력으로 바꾸는 수고도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수고를 없애는 것 말고도 다른 좀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를 타도한 혁명은 2월 혁명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그러나 신력으로 바꿀 경우 3월 혁명이 된다. 임시정부의 제국주의 정책에 저항한 무장 시위는 "4월 시기"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그러나 신력으로는 5월이 된다. 다른 사건들과 날짜를 제외하더라도 10월 혁명은 신력으로 11월에 일어났다. 다 알고 있듯이 달력이란 역사 사건들로 채색되어있다. 따라서 역사가는 단순한 산수 계산으로 혁명 연표를 다룰 수는 없다. 구력을 타도하기 전에 혁명은 먼저 구력에 집착해 있던 구제도들을 타도해야 했다는 점을 독자들은 선심으로 기억할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

프린키포에서,

1930년 11월 14일.

 

 

제 1장: 러시아 사회 발전의 특이성

 

러시아 역사의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일관된 특징은 사회 발전의 느린 속도이다. 이 결과가 경제의 후진성, 사회형태의 원시성, 문화수준의 낙후성으로 나타났다.

이 나라의 광활하고도 거친 대평원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아시아 민족들의 이동에 자신을 열어주었다. 이 대평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민족들은 불리한 자연조건에 의한 오랜 후진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유목민족에 대한 이들의 투쟁은 17세기 끝까지 계속되었다. 겨울 추위와 여름 가뭄을 가져오는 바람에 대해 이들은 아직도 힘겹게 싸우고 있다. 사회 발전의 기초인 농업은 집약농업이 아니라 조방농업으로 발전했다. 북쪽에서 이들은 숲을 베어내고 불태웠으며 남쪽에서는 태초 그대로의 광활한 초원지역을 침입했다. 자연 정복은 깊고 철저히 진행되기보다는 느슨하게 산지사방으로 전개되었다.       

서쪽의 야만 민족들은 로마문화의 폐허 위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는 오래된 수많은 돌이 건축재료로 즉시 이용될 수 있도록 널려있었다. 반면 동쪽의 슬라브족은 황량한 평원에서 문화 유산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차라리 자신들이 만든 문화가 선조의 문화보다 수준이 더 높았다. 서유럽 민족들은 자연이 만든 국경을 인정하고 이 안에서 경제적 문화적 결절점인 상업도시들을 건설했다. 반면에 동쪽 대평원의 민족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징조가 나타나는 순간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거나 광활한 초원 위로 퍼져나갔다. 서쪽 농민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부위는 도시민, 수공업자, 상인이 되었다. 동쪽 농민의 적극적이고 대담한 부위는 더러는 상인이 되었으나 대부분은 카자흐(역자 주: 타타르족과 슬라브족의 혼혈 종족. 유목생활을 하며 러시아 제국 시절 반동적 군대를 제공하는 대신 독립적 특권을 일부 누렸다.)와 변방 개척민이 되었다. 서쪽에서는 치열한 사회분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동쪽에서는 이 과정이 지연되거나 국경의 확장에 의해 묽어졌다. 표트르 대제와 동시대인이었던 이탈리아의 비코(Vico)는 이렇게 적었다: “기독교인인 모스크바의 짜르는 머리가 느려터진 민족을 통치하고 있다.” 모스크바 사람들의 “느려터진” 머리는 경제발전의 느린 속도, 사회 발전의 낙후성에 따른 계급 관계의 미분화, 내부 역사발전의 일천함을 반영하였다.

이집트, 인도, 중국의 고대문명들은 생산력이 낮았다. 그러나 공예품의 정교함과 맞먹는 수준으로 사회 관계들을 발전시킬 자족적 특성과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리, 사회, 역사에 있어서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했다. 따라서 서유럽 뿐 아니라 동방의 아시아와도 뚜렷이 구분되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면서 한때는 전자에 또 한때는 후자에 접근했다. 동방은 러시아에게 타타르족(역자 주: 칭기즈칸을 따라 동유럽과 서아시아를 침략한 몽고계, 터어키계 유목민족)의 야만성을 멍에로 씌웠다. 이 멍에는 러시아 국가 구조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서방은 동방보다 더 위협적인 적이었으나 동시에 스승이기도 했다. 러시아는 동방의 사회형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방의 군사적 경제적 압력에 끊임없이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역사가들은 러시아에 봉건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후의 연구를 통해 봉건적 관계가 존재했다고 무조건적으로 인정된 것 같다. 더욱이 러시아 봉건제도의 근본 요소들은 서방의 것들과 같았다. 그러나 봉건시대의 존재는 더 많은 과학적 연구에 의해 확립되어야 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러시아 봉건제도의 불충분한 발달, 미분화, 문화적 업적의 빈곤 등이 충분히 입증된다.

후진국은 선진국의 물질적 지적 성과를 흡수한다. 그러나 이 성과를 노예처럼 비굴하게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또한 선진국의 모든 발전 단계들을 그대로 반복하지도 않는다. 비코와 최근 그의 추종자들은 순환적 반복적 역사관을 제창했다. 그러나 이 역사관은 오래된 전(前)자본주의 문화권들의 반복적 순환현상들을 관찰한 결과에 불과하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첫 실험들을 관찰한 결과이다. 계속 새로 존재하는 유럽인의 식민지들은 문화적 단계들을 일부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 현상은 문화발전 자체의 지방적이며 일회적인 특성과 긴밀히 결합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조건들을 극복한다. 자본주의는 인간 발전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준비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실현한다. 이로써 후진국은 선진국의 발전 형태를 반복하지 않는다. 후진국은 선진국을 뒤따르도록 강요당한다. 그러나 선진국과 같은 순서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후진성의 특권은 진짜 존재한다. 특정 시점에서 최신 성과들을 바로 받아들이면서 후진국은 발전의 중간단계들을 건너뛴다. 야만인은 활을 내던지고 즉시 소총을 무기로 사용한다. 중간단계에 해당하는 무기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메리카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처음부터 역사를 다시 시작하지 않았다. 독일과 미국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추월했는데 이것은 두 나라가 자본주의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영국 석탄산업 그리고 맥도널드(역자 주: 영국 노동당 당수로 최초로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노동운동 내부에서 자본의 부관으로 기능하는 노동조합 관료들의 계급적 이익을 대표하는 서구 개량주의의 시조.)일당의 두뇌는 보수적 무질서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영국이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선구자였기 때문에 드러난 현상이다. 말하자면 과거의 보복인 셈이다. 후진국의 발전 과정은 역사의 다양하고 개별적인 과정들을 필연적으로 특이하게 결합한다. 이 결과 무계획성, 복잡성, 결합성 등이 일반적 특징으로 드러난다.

물론 중간단계들을 건너뛸 가능성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가능성은 장기적으로 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능력에 달려있다. 더욱이 후진국은 자신의 토착 원시문화에 외국문화를 도입하면서 아주 빈번하게 외국문화가 원래 가지고 있던 품질을 떨어뜨린다. 이렇게 흡수과정 자체는 자기 모순적이다. 예를 들어 표트르 대제는 서구의 기술과 훈련의 일부 요소들 특히 군사적 공업적 요소들을 러시아에 도입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러시아 생산조직의 기본 형태인 농노제는 더 강화되었다. 선진문화의 산물이 틀림없는 유럽의 군비와 신용대부는 봉건적 짜르 체제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이 강화된 체제는 러시아의 발전을 지연시켰다.

역사의 법칙은 현학자의 도식과는 전혀 무관하다. 발전의 불균등성은 역사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진국의 역사발전에 가장 날카롭고 복잡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외세의 압력에 직면하여 후진국의 문화는 도약을 강요받는다. 따라서 보편 법칙인 발전의 불균등성에서 결합발전(combined development)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법칙이 따라 나온다. 즉 역사의 각 단계들이 겹치게 되면서 현대적인 형태들이 낡은 형태들과 혼합된다. 이 법칙의 유물론적 내용 전체를 받아들인다면 러시아 또는 이류, 삼류 아니 십류 문화국의 어떤 역사도 이 법칙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러시아는 부강한 유럽 제국의 압력을 받았다. 이 결과 서방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인민의 부를 국가적 목적을 위해 집어삼켰다. 러시아 인민은 이중의 빈곤을 강요당했고 유산 지배계급의 경제 기반은 약화되었다. 러시아 국가는 지배계급의 지지가 필요했으나 동시에 이 계급의 성장을 강제하고 자신의 의지에 복종시켰다. 이 결과 관료적 특권계급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었다. 이 결과 러시아는 아시아 전제군주제와 근접하였다. 16세기 초 짜르가 공식 채택한 비잔틴 전제체제는 신 귀족계급의 도움을 받아 봉건 보이야르(역자 주: Boyars, 표트르 대제 이전까지 존재했던 러시아 구 귀족계급)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농민을 국가의 노예로 만들어 신 귀족계급을 제압했다. 그리고 이 기초 위에 뻬쩨르부르그를 수도로 절대주의 제국을 건설했다. 16세기  말에 수립된 농노제는 17세기에 그 형태가 완성되었으며 19세기에 꽃을 피운 후 1861년이 되어서야 법적으로 폐기되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러시아 국가발전의 후진성이 전부 드러난다.

귀족계급 다음으로 성직자계급도 짜르 전제체제를 수립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역할은 비굴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러시아 교회는 서방 카톨릭교회처럼 거대한 절정을 결코 맞지 못했다. 전제체제의 정신적 시녀 역할에 만족한 후 이것을 자신의 겸손함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주교와 대주교들은 세속 권력의 부관이 되어야 그나마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교회의 수장인 대주교는 짜르가 바뀌면서 함께 바뀌었다. 뻬쩨르부르그 시기에 국가에 대한 교회의 종속성은 더 심화되었다. 20만 명에 달하는 신부와 수도승은 실제로는 국가관료집단의 일부가 되어 일종의 복음경찰이 되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교회는 신앙, 토지, 수입 등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그리고 진짜 경찰의 보호를 받아 이것을 방어했다.

슬라브족 애호주의(Slavophilism)는 후진국의 구세주 사상이다. 이 사상은 러시아 인민과 교회는 철저히 민주적인데 러시아 국가기구는 표트르 대제가 강요한 독일 관료주의에 불과하다는 사고에 기초하였다. 이 사상을 맑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독일의 멍청이들은 프랑스 계몽주의의 감화를 받은 프레드릭 2세의 압제에 대해 프랑스 사람들을 비난했다. 후진국 노예들은 선진국 노예들이 자기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짧은 논평은 슬라브족 애호주의자들의 낡아빠진 철학 뿐 아니라 최근 “인종주의자들”의 언행도 완벽하게 논박한다.

상업과 수공예의 중심지인 진정한 중세 도시는 러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러시아 봉건시대 뿐 아니라 러시아 역사 전체의 빈곤을 가장 우울하게 표현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수공업은 농업과 분리되지 못한 채 가내공업을 통해 그대로 유지되었다. 러시아의 구 도시들은 상업, 행정, 군사, 장원의 필요에 따라 건설되었다. 따라서 생산 중심지가 아니라 소비 중심지였다. 노브고로트는 한자동맹의 도시와 성격이 같았으며 타타르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도시조차 상업도시였을 뿐 공업도시는 아니었다. 넓은 지역에 걸쳐 농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규모의 중개무역업이 정말 필요했다. 그러나 유목민들과 거래하는 상인들이 이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다. 서방에서는 농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던 수공업 길드, 상공업 중소 자본가들이 이 역할을 맡았다. 더욱이 러시아의 주요 무역로는 국경을 넘었다. 따라서 오랜 옛날부터 무역의 주도권은 외국 상업자본에게 있었다. 이 결과 러시아는 일종의 반(半)식민지가 되었고 러시아 무역인들은 서방 도시와 러시아 농촌 사이에 다리를 놓은 중개인에 불과했다. 이런 종류의 경제 관계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하여 제국주의 전쟁에서 그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러시아 도시의 낮은 비중은 무엇보다도 아시아식 국가기구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봉건관료적 정교회를 부르주아 사회의 요구에 걸맞는 현대화된 기독교로 대체시키는 종교개혁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국가기구에 저항하는 투쟁은 농민 종파들의 선을 넘지 못했는데 구신도(Old Believers) 종파는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프랑스 대혁명보다 15년 앞서서 러시아 우랄지역에는 카자흐, 농민, 노동자-농노 등의 운동인 푸가초프 반란이 터졌다. 이 위협적인 인민봉기가 혁명으로 전환되려면 상공업 부르주아 계급이 존재해야 했다. 도시 산업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지도하지 않는 농민전쟁은 혁명으로 전환될 수 없었다. 이것은 농민 종파가 종교개혁의 절정에 도달할 수 없는 것과 똑같았다. 푸가초프 반란으로 귀족계급의 이익을 지켜주는 관료적 절대주의는 강화되었다. 즉 원래 운동의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위협받는 순간에 구체제는 자신의 정당성을 다시 입증시켰을 뿐이었다.       

표트르 대제가 시작한 러시아의 유럽화는 그 다음 세기에는 더욱더 지배계급 귀족들의 요구가 되었다. 1825년 귀족계급의 지식층은 이 요구를 정치적으로 일반화하면서 짜르의 권한을 제한하는 군사적 음모를 꾸몄다. 유럽 자본주의가 압력을 가하자 존재하지 않는 상공업 부르주아 계급을 진보적 귀족층이 대신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이들은 자유주의 체제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지배를 안정시키고 강화시키려 했다. 따라서 농민을 자극하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다. 이 결과 군사적 음모는 대중운동으로 확대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되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군대 장교들의 시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들은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이 시도를 포기했다. 제까브리스트(12월당) 봉기의 의의는 이 정도에 불과했다.   

공장을 소유했던 지주들은 농노제를 임금노동으로 대체하는 것을 찬성한 최초의 지주 분파였다. 러시아산 곡물 수출이 점점 늘어나자 농노제 해체의 흐름이 추진력을 얻었다. 1861년 자유주의 지주층의 지지를 업고 귀족 관료층은 농업개혁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힘없는 자유부르주아 계급이 겸허하게 들러리를 섰다. 짜르 체제는 러시아의 근본문제인 농업문제를 아주 인색하게 도둑놈처럼 해결했다. 다음 10년간 프로이센 왕정이 독일의 근본문제인 국가통일 문제를 해결했던 방식보다 더 짜게 굴었다.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어느 계급의 문제를 다른 계급이 대신 해결해주는 경우는 후진국에 늘 있는 결합발전의 한 방식이다.

러시아 공업의 역사와 성격에서 결합발전의 법칙은 가장 의심의 여지없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늦게 시작된 러시아의 공업은 선진국의 발전과정을 반복하지 않고 이 발전과정 자체에 스스로를 투여하여 자신의 후진성에 선진국의 최신 성과들을 접목시켰다.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경제 발전은 수공업 길드와 공장제 수공업의 시기를 건너뛰었다. 이와 똑같이 공업의 각 부문들은 서방에서 수십 년이 걸린 기술단계들을 일련의 예외적인 도약들을 통해 건너뛰었다. 이 덕분에 러시아의 공업은 한순간에 예외적으로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1905년 혁명과 제 1차 세계대전 사이에 러시아의 공업생산은 거의 두 배로 늘었다. 이 현상 때문에 러시아 역사가들 일부는 “러시아의 후진성과 느린 발전속도라는 통념을 버려야 한다(저자 주: 포크로프스키 교수가 이렇게 주장했다.)”고 결론 내릴 충분한 근거를 확보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이 급속한 성장의 잠재력은 후진성 자체에 있었다. 그리고 이 후진성은 구체제의 청산 직전 뿐 아니라 지금도 유감스럽게 유산으로 남아있다.

일국 차원에서 경제수준의 기본조건은 노동생산성이다. 그런데 이 노동생산성은 나라의 경제 일반에서 차지하는 개별 공업부문들의 상대적 비중에 달려있다. 제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짜르의 러시아는 번영의 정점에 도달했는데 일인당 국민소득은 미국보다 8배에서 10배까지 적었다. 이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러시아에서 경제 인구의 5분의 4는 농업에 종사했다. 반면 미국에서는 농업인구 1인당 공업인구는 2.5인이었다. 그리고 덧붙일 필요가 있는 사실이 더 있다. 제 1차 세계대전 전야에 러시아는 1백 평방킬로미터의 땅에 철도의 길이가 0.4 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독일은 11.7 킬로미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 킬로미터였다. 다른 비교지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경제분야에서 결합발전 법칙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혁명 직전까지 러시아 농민의 토지경작은 일반적으로 17세기의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공업은 기술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측면에서 선진국의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선진국들을 추월했다. 100명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한 영세기업은 1914년 미국의 경우 전체 공업인구의 35%를 차지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이 비율은 17.8%에 불과했다. 100명에서 1000명 사이의 노동자를 둔 기업들의 상대적 비중은 두 나라가 동일했다. 그러나 1000명이 넘는 노동자를 둔 거대기업은 미국의 경우 전체 공업인구의 17.8%를, 러시아의 경우 41.4%를 차지했다! 가장 중요한 공업지구의 경우 이 비율은 더 높았다. 뻬쩨르부르그 지구에서 이 수치는 44.4%이었으며 모스크바 지구의 경우 심지어 57.3%까지 되었다. 러시아를 영국이나 독일과 비교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필자가 1908년 최초로 확인한 이 사실은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이라는 통념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실은 러시아의 후진성을 부인하기보다 변증법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공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결합 수준도 역시 러시아가 가장 높았다. 그리고 은행자본이 공업자본을 지배하듯이 서유럽 자본시장은 러시아 공업자본을 지배했다. 금속, 석탄, 석유 등 중공업은 거의 전부 외국 금융자본의 손안에 있었다. 한편 외국 금융자본은 자기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러시아에 종속적인 중간단계 은행들을 탄생시켰다. 경공업도 같은 처지였다. 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주식의 약 40%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업의 주요부문들에서 이 비율은 더 높았다. 과장이 전혀 없이 러시아의 은행, 공장, 생산설비의 지배적인 주식은 해외에 있었으며 영국, 프랑스, 벨기에는 독일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러시아 주식을 손에 넣고 있었다.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사회 성격과 정치적 모습은 러시아 공업의 유래와 구조에 의해 결정되었다. 공업의 극단적인 집중도(集重度) 하나만 보아도 이 사실은 확인된다. 이 때문에 자본가 지도층과 대중 사이에는 중간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 덧붙여 주요 공업, 은행, 수송 관련 기업들의 소유주는 외국인이었다. 이들은 투자 이윤을 실현시켰을 뿐 아니라 러시아 의회에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했다. 그래서 러시아 의회체제의 발전을 촉진하기는커녕 저해했다. 프랑스 정부의 부끄러운 짓거리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러시아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고립과 반(反)인민적 성격은 근본적으로 이 때문이었다. 러시아 역사의 여명기에 자본가 계급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부르주아 혁명을 주도할 시간이 다가왔으나 너무 늙어서 힘을 쓸 수 없었다.

러시아 사회의 일반적 발전 과정에 조응하여 러시아 노동계급이 배출된 수원지는 공예-길드가 아니라 농업이었으며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었다. 여러 시대를 거쳐 형성된 영국의 노동계급은 전통의 짐을 그대로 지고 다녔다. 반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환경, 끈, 관계 등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과거와 날카롭게 단절하여 도약했다. 짜르 국가의 집중된 억압 때문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혁명 사상의 가장 대담한 결론들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것은 마치 후진국이 자본주의 생산조직의 최신 발명품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았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신의 일천한 역사를 영원히 반복하고 있었다. 금속산업 특히 뻬쩨르부르그의 경우 세습 노동계급의 한 부위가 형성되면서 농촌과 완전히 단절했다. 그러나 우랄지역에서는 반(半)노동자 반(半)농민이 지배적이었다. 농촌으로부터 모든 공업지구들로 신선한 노동력이 유입되면서 노동계급의 기본 수원지인 농민층은 노동계급과 연대를 계속 새롭게 했다.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무능력은 노동계급 및 농민과의 관계에서 직접 발생했다. 노동계급은 일상생활에서 자본가 계급에게 적대적이었으며 자기 문제를 아주 일찍 일반화하는 법을 배웠다. 당연히 자본가 계급은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지도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자본가계급은 농민도 지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본가계급은 지주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으며 어떤 종류든 소유관계의 혁신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에 혁명이 늦게 터진 이유는 사회발전의 느린 속도 뿐 아니라 사회구조에도 존재했다.

영국은 인구가 5백5십만이 넘지 않았을 때 부르주아 청교도 혁명을 완수했다. 그런데 이 가운데 50만이 런던에 거주하고 있었다. 대혁명 시기에 프랑스의 경우 2천5백만 인구 가운데 빠리의 인구는 50만에 불과했다. 20세기초 러시아 인구는 1억5천만이었으며 이 가운데 3백만 이상이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다. 이 비교 수치에 엄청난 사회적 차이가 숨어있다. 17세기 영국 뿐 아니라 18세기 프랑스에는 현대적 의미로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5년 러시아의 농촌과 도시의 모든 공업 분야에서 노동계급은 1천만을 넘었다. 여기에 부양가족을 포함시키면 2천5백만이 넘는다. 즉 부르주아 대혁명 시기 프랑스의 전체 인구보다 많았다. 크롬웰 군대의 주축이었던 억센 수공업자와 자영농민, 빠리의 평민, 뻬쩨르부르그의 공업노동자로 이어지면서 혁명은 사회체제, 투쟁 방식, 정치 목표 등을 크게 변화시켰다.

1905년 혁명은 1917년의 두 혁명이었던 2월 및 10월 혁명의 서막이었다. 서막에는 극의 모든 요소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습을 보였을 뿐 실제 연극 과정에 모두 동원되지는 않았다. 러일전쟁은 짜르 체제를 뒤흔들었다. 대중운동을 배경으로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짜르 왕정에 반대하여 구체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노동계급은 자본가 계급에 반대하여 독자적으로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역사상 최초로 등장했다. 토지 점거를 목표로 농민봉기가 광활한 러시아 전국에서 일어났다. 농민 뿐 아니라 군대의 혁명적 부위 역시 소비에트를 지지했다. 투쟁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소비에트는 공공연히 짜르와 국가권력을 다투었다. 그러나 이때 모든 혁명세력은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했을 뿐 경험과 자신감이 부족했다. 체제를 뒤흔드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며 그것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혁명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혁명으로부터 후퇴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인민운동 내에 민주적 지식인들을 상당수 끌고 들어갔었다. 그런데 이 계급이 이제 인민과 자신 사이에 확실한 분리선을 그었다. 이 때문에 짜르는 군대 내에 왕당파 부대들을 혁명파와 분리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자 농민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손쉽게 자행했다. 갈비뼈가 몇 개 부러지기는 했어도 짜르 체제는 1905년 혁명을 겪으면서 생기 있고 튼튼하게 살아남았다.

이 서막과 본격적인 드라마를 가르는 11년의 역사는 계급 역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이 기간동안 짜르 체제는 역사발전의 요구와 더욱 날카롭게 갈등을 일으켰다.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적으로 더 강력해졌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 계급의 권력은 공업의 상대적 집중도와 외국 자본의 더욱 강화된 지배력에 기초하고 있었다. 1905년을 교훈 삼아 부르주아 계급은 보수성과 의심증을 더욱 키워갔다. 과거에도 미미했던 중소 부르주아 계급의 상대적 비중은 더 낮아졌다. 일반적으로 말해 민주적 지식층은 사회적 기반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었으나 독자적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이 계층의 종속성은 이미 크게 높아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젊은 노동계급만이 농민에게 강령, 깃발, 지도력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 노동계급에게는 한가지 요소가 시급히 필요했다. 인민대중을 혁명으로 금방 나서게 지도할 특별한 혁명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05년의 소비에트는 1917년에 거대하게 성장했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후진성이 낳은 자식일 뿐 아니라 결합발전의 산물이다. 공업이 가장 발전한 독일에서 노동계급이 1918-1919년의 혁명 절정기에 소비에트 이외의 다른 조직형태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입증한다.

1917년 혁명의 시급한 임무는 관료적 짜르 체제의 타도였다. 그러나 과거 부르주아 혁명들과는 달리 이제 혁명의 결정적인 원동력은 집중된 공업의 기초 하에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투쟁방법으로 무장한 새로운 계급이었다. 여기서 결합발전 법칙은 극단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부패한 봉건 국가기구의 타도를 시작으로 하여 몇 달만에 혁명은 노동계급과 공산당을 국가권력의 정점으로 상승시켰다.

애초의 임무를 보았을 때 러시아 혁명은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정치 민주주의의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제기했다. 노동자들이 병사와 농민을 일부 포함시킨 채 나라 전역에 소비에트를 건설하는 동안 부르주아 계급은 계속해서 물건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즉 제헌의회 소집 문제를 따지고 있었다. 본 저서를 통해 이 문제는 완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다만 지금은 혁명 사상과 투쟁형태의 역사적 연속과정 속에 소비에트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으로 논의를 제한하겠다.

17세기 중엽 영국의 부르주아 혁명은 종교개혁의 외양을 띠고 일어났다. 자기 나름의 기도서에 따라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권리를 갖기 위한 투쟁은 왕, 귀족, 교회의 수장, 로마 카톨릭 교황에 대한 투쟁과 동일시되었다. 장로교도들과 청교도들은 자기의 세속적 이익을 신의 섭리가 흔들림 없이 보호하고 있다고 깊게 확신하고 있었다. 새로운 계급들의 투쟁 목표들은 이들의 의식 속에 성경 구절 그리고 교회에서의 예배방식과 분리될 수 없었다. 신대륙의 이주자들은 피로 봉해진 이 전통을 대서양 건너까지 가지고 갔다. 앵글로-색슨족이 기독교를 해석할 때 뿜어내는 엄청난 박력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경이라는 마술 책으로 17세기 사람들은 자기 용기를 정당화시켰다. 그런데 똑같은 이 마술 책으로 영국의 “사회주의자” 장관들은 자신들의 비겁함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프랑스는 종교개혁의 물결을 건너뛰었다. 카톨릭교회는 부르주아 혁명 때까지 국가제도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혁명은 성경 본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추상어를 통해 부르주아 사회건설의 임무를 표현하고 정당화시켰다. 현재 프랑스의 지배자들은 자코벵주의를 대단히 증오하고 있다. 그러나 로베스삐에르의 금욕적인 근엄한 노력 덕분에 이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보수적 통치를 구체제를 폭발시켰던 구호인 민주주의로 은폐할 수 있다.  

거대한 혁명들 하나 하나는 부르주아 사회의 새로운 단계를 확정했다. 그리고 사회 계급들의 새로운 의식형태도 탄생시켰다. 프랑스가 종교개혁을 건너 뛴 것과 똑같이 러시아 역시 형식적 민주주의를 건너뛰었다. 자신의 성격을 혁명 시대 전체에 뚜렷이 남기게 될 러시아의 혁명정당은 혁명의 임무를 성경책 또는 “순수” 민주주의라는 세속화된 기독교가 아니라 사회계급의 물질적 관계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소비에트 체제는 이 관계를 가장 단순하게 거짓 없이 투명하게 표현했다. 근로인민의 통치가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에트 체제를 통해 실현되었다. 이 체제가 가까운 장래에 겪을 역사적 풍파는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이나 순수 민주주의가 당시 대중의 의식에 깊이 새겨진 것처럼 소비에트 체제도 대중의 의식 속에 깊이 새겨졌다.  

 

  제 2장 전시(戰時)의 짜르 체제

러시아가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동기와 목적은 전부 자기 모순적이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근본적으로 세계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범위는 러시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그러나 터어키 해협, 갈리시아, 아르메니아에서 러시아가 벌인 전쟁들은 국지전이었으며 그 목적은 주요 교전국들의 이해에 부응하는 정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

동시에 러시아는 하나의 강대국으로서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의 싸움에 끼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바로 전까지 상점, 공장, 철도, 자동화기, 비행기 등 서방의 문물을 국내로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똑같았다. 러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학파가 최근에 성립했다. 그런데 이 학파에 속하는 학자들 사이에 빈번하게 논쟁들이 벌어졌다. 이 논쟁들의 쟁점은 러시아가 추진했던 제국주의 팽창정책의 시기적절성 여부이다. 그러나 이 논쟁들은 스콜라주의 식으로 대단히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이 논쟁들은 국제무대에서 러시아를 고립된 독립적 요인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러시아는 세계체제의 고리에 불과했다.

인도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로 이 전쟁에 참여했다. 중국의 참전은 형식적으로는 “자발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주인들끼리의 싸움에 노예 하나가 끼어 든 것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참전 이유는 프랑스와 중국의 참전 이유 사이에 위치했다. 참전을 통해 러시아는 선진 자본주의국가들과 동맹하여 이들의 자본을 수입하고 이자를 지불할 권리를 샀다. 즉 동맹국들로부터 특혜를 받는 자본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터어키, 페르시아, 갈리시아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더 허약하고 후진적인 국가들을 억압하고 강탈할 권리도 함께 샀다. 러시아 자본가 계급의 이중적 제국주의는 자신보다 더 강한 국가들의 하수인이라는 근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매판자본가는 민족자본가 계급의 고전적인 유형으로 외국 금융자본과 중국 경제 사이의 중개인이다. 세계 강대국의 순위에서 제 1차 세계대전 전에 러시아는 중국보다 한참 높았다. 전쟁 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의 순위가 어떠했을 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전제 체제와 부르주아 계급은 모두 매판자본주의의 특징들을 더욱 명확히 가지고 있었다. 즉 외국 제국주의 세력과 연줄을 맺어 이들에게 봉사했으며 이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혁명이 승리했기 때문에 이들의 지원을 받고도 살아남지 못했다. 반(半)매판자본의 러시아 자본가 계급은 세계제국주의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몇 퍼센트의 수수료를 받으면서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하수인과 똑같았다.

전쟁의 도구는 군대이다. 민족 신화에서 군대는 남의 나라 군대에 의해 절대로 정복될 수 없다. 당연히 러시아 지배계급도 짜르 군대를 신화로 포장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군대는 반(半)야만 민족, 이웃 약소국, 붕괴 와중의 나라에 대해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전쟁터에서는 연합 세력의 일부가 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 군대는 광대한 영토, 산산이 흩어져 있는 인구, 다니기 힘든 도로의 도움을 통해서만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농노들로 구성된 이 군대의 거장은 수보로프였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군사기술의 시대를 연 프랑스 대혁명은 수보로프 식 군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농노제의 절반이 폐지되고 국민 징병제가 도입되어 러시아 군대는 현대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식 현대화에 불과했다. 부르주아 혁명을 아직 완수하지 못한 나라의 온갖 모순들을 군대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짜르 군대가 서구의 모델에 따라 창설되고 무장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도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그랬다. 낙후된 농촌문화의 산물인 병사는 현대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없었다. 지휘관들은 지배계급의 무식, 경박성, 거짓 등의 악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시의 요구들이 집중적으로 제기되기도 전에 이들의 무능력은 공업과 수송 분야에서 계속 드러났다. 전쟁 첫날에 군대는 무장을 제대로 갖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기도 신발도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러일전쟁은 짜르 군대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1905년 혁명의 패배와 함께 도래한 반혁명 시기에 짜르 왕정은 의회의 도움으로 군대의 창고에 군수품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특히 천하무적이라는 신화에 누더기 깁듯이 여기 저기에서 많은 개선을 이루었다. 그러나 1914년에 이 군대는 새롭고 훨씬 무거운 시험에 직면했다.

군수물자와 자금 면에서 러시아는 동맹국들에게 노예처럼 종속된 존재에 불과하다. 이 사실이 전쟁과 함께 갑자기 드러났다. 이것은 러시아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전반적으로 종속되어 있음을 군사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동맹국들의 지원이 상황을 호전시키지는 않는다. 탄약의 부족, 적은 수의 탄약생산 공장, 탄약수송용으로는 너무도 빈약한 철도망 등으로 러시아의 후진성은 곧바로 패배라는 익숙한 단어로 번역되었다. 전쟁 패배로 러시아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선배들이 부르주아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후배들인 자기들이 역사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전쟁의 첫날은 수모의 첫날이었다. 일련의 부분적인 군사적 재앙 후 1915년 봄에 대규모적인 후퇴가 불가피했다. 장군들은 자신들의 범죄적 무능력을 민간인들에게 전가시켰다. 광활한 토지가 무참하게 황무지로 변했다. 인간 메뚜기 떼가 채찍질을 당해 떼거지로 후방으로 밀려들었다. 겉으로 드러난 대대적인 패배와 후퇴는 곧 심리적인 대규모 패배와 후퇴가 되었다.

동료 장관들이 전선의 상황에 대해 걱정스럽게 질문하자 전쟁 장관 폴리바노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광활해서 건널 수 없는 대평원, 지나다닐 수 없는 진흙탕 도로, 성스러운 러시아의 수호자 성 니콜라스 미를리키스키의 은총을 신뢰할 뿐입니다.”(1915년 8월 4일 회의) 이로부터 일주일 후 루즈키 장군은 같은 장관들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 지금 요구되는 군사 기술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독일군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군대의 일시적 정서가 아니었다. 스탄케비치 장교는 공병대 엔지니어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독일군과의 대적은 가망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 군대는 어떻게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술조차 패배의 원인이 될 뿐이다.” 이런 증언은 수없이 많다. 러시아 장군들이 멋을 내며 신나게 했던 유일한 일은 나라의 인적 자원을 시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도 병사의 시체보다는 훨씬 더 경제적으로 처리된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직속의 야누슈케비치, 짜르 직속의 알렉세이예프 등 무능한 지휘관들은 새로 동원령을 내려 병사들로 전선의 모든 틈을 메웠다. 그리고 실제 전투력이 있는 병사들이 필요한 경우에는 숫자상의 대단한 병력을 제시하며 자신들과 동맹국들을 위로했다. 약 1천5백만 병사들이 동원되어 신병훈련소, 부대 막사, 병력이동소 등을 꽉 채웠다. 이들은 한 군데에 몰려 있으면서 몸에 도장이 찍히고 옆에 있는 병사들의 발을 밟았다. 그리고 서로 거칠게 굴면서 욕을 퍼부었다. 이 인간의 무리가 전선에서 가상의 규모였다면 후방에서는 진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약 5백5십만 병사들이 전사자, 부상자, 포로로 집계되었다. 탈영병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이미 1915년 7월 장관들은 이렇게 되풀이 외쳤다: “불쌍한 러시아여! 과거에 승리의 포효로 전세계를 호령했던 러시아의 군대조차 ... 겁쟁이와 탈영병의 무리임이 드러났다.”

장관들조차 장군들의 “후퇴할 때의 용감성”에 대해 음흉한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키에프에 안치된 성인들의 유골을 이전할 것인지 말 것인지 등 하찮은 문제들을 논의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골 이전 문제에 대해 짜르는 이전이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독일군은 유골들을 건드릴 생각을 감히 못할 것이다. 건드리면 자기들만 손해볼 것이다.” 그러나 정교회의 종교회의는 이미 유골 이전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말했다: “우리가 이곳을 버릴 경우, 가장 소중한 것은 가지고 간다.” 이 일화는 십자군 전쟁 때의 일이 아니다. 러시아군의 패배 소식이 무선 전신으로 전해지던 20세기의 일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 대한 러시아 군대의 승리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그 원인이 있었다. 해체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정은 이미 오래 전에 장의사를 구한다는 간판을 내걸었었다. 장의사의 자격요건은 요구하지도 않았다. 과거에 러시아는 자체 붕괴를 겪고 있던 터어키, 폴란드, 페르시아 등을 패배시켰었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군의 남서 전선은 대단한 승리들을 기록하여 다른 전선들과는 매우 달랐다. 이 전선에서 등장한 몇몇 장군들은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당연히 증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패배를 거듭한 지휘관의 숙명주의에 찌들어있었다. 10월 혁명의 승리 후 이어진 내전 시기에 이들 가운데 일부는 백군의 “영웅들”로 모습을 나타냈다.

전쟁 패배의 책임을 물을 인물을 찾느라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은 유태인들 전부가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고 싸잡아 비난했으며 독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사령부는 헌병 대령 미야소예도프를 독일 스파이로 몰아 사형 명령을 내렸다. 물론 그는 독일 스파이가 아니었다. 이들은 속이 빈 칠칠맞은 전쟁 장관 수호믈리노프를 반역죄로 체포했다. 물론 반역죄에 대한 근거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국의 외무장관 그레이는 러시아 의회대표단 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시에 전쟁 장관을 반역죄로 기소한다면 귀하의 정부는 정말 대담합니다.” 총사령부와 의회는 짜르의 내각을 친독파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모두 동맹국들을 부러워하면서 동시에 증오했다. 프랑스 사령부는 자기 병사들을 아끼기 위해 러시아 병사들을 전투에 투입했다. 영국군은 천천히 전투에 참여했다. 뻬쩨르부르그의 응접실과 전선의 사령부에서는 부드럽게 이런 농담이 나돌았다: “영국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모두 흘리며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 그런데 이 피는 러시아 병사의 피이다.” 이런 농담들은 군 조직 체계의 아래로 스며들어 전선의 참호에 도달했다. 장관, 의원, 장군, 기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자!” 그러자 참호에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최후의 피 한 방울은 나의 피를 말하는 것이다.”

전쟁 기간 통틀어 러시아군은 국지전에 참여했던 어떤 군대보다 병력 손실이 컸다. 약 2백5십만 명의 병사가 사망했는데 이 수치는 동맹국 전체 병력 손실의 40%에 해당되었다. 전쟁 첫 몇 달 동안 러시아 병사들은 아무 생각 없이 또는 거의 생각 없이 포화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경험은 늘어났다. 이것들은 무식한 지휘관 밑의 하급병사들이 겪는 쓰라린 경험이었다. 이들은 밑창도 없는 신발을 신고 목적도 없는 작전에 투입되거나 저녁 식사를 먹지 못한 횟수를 모두 확인하면서 장군들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측정했다. 사람과 사물의 피범벅 속에서 이 상황을 일반화시킨 “엉망진창”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은 병사들의 더 생생한 은어로 대체되었다.

농민으로 구성된 보병은 해체 속도가 가장 빨랐다. 일반적으로 공업노동자의 비율이 높은 포병은 혁명 사상을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받아들인다. 1905 혁명은 이 점을 입증시켰다. 이와 반대로 1917년에는 포병이 보병보다 혁명사상을 수용하는데 더 보수적이었다. 보병 사단을 통해 마치 채에 걸러지는 모래처럼 경험이 더 미숙하고 덜 훈련된 대중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이 때문에 보병은 혁명 사상에 더 적극적이었다. 더욱이 포병은 보병보다 전투에서 사상자가 훨씬 더 적었기 때문에 애초의 간부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전문화 부대들에도 똑같은 현상이 목격되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포병도 혁명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갈리시아 전선에서 후퇴하던 중 총사령관의 비밀명령이 떨어졌다: 탈영과 기타 범죄를 저지른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가해라. 피레이코 병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놈들은 가장 하찮은 위반사항에 대해서도 채찍질을 가했다. 허락 없이 몇 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이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었다. 때때로 이들은 병사들의 오기를 키우기 위해 채찍질을 가했다.” 1915년 9월 17일에 이미 쿠로파트킨은 그의 글에서 구츠코프의 말을 인용했다: “병사들과 하급장교들은 열성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지쳐있으며 계속되는 후퇴 속에서 승리에 대한 신념을 상실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간에 이 내무장관은 부상에서 회복중인 3만의 병사가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규율이라고는 전혀 없는 난폭한 군중이다. 소동을 일으키고 경찰과 싸우고(최근에 경찰 한 명이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체포된 사람들을 구출하는 등 나쁜 짓을 일삼고 있다. 소요가 발생하면 이들 모두는 당연히 군중과 한패가 될 것이다.” 피레이코 병사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전쟁이 끝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누가 승리할 것이며 어떤 평화조약이 체결될 지는 관심 밖이다. 군대는 무조건 평화를 원했다. 전쟁에 지쳤기 때문이다.”

자원 간호원으로 일하던 관찰력이 예민한 여성 페오도르첸코는 병사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그들의 마음까지 읽었다. 그리고 흩어진 종이쪽지에 꼼꼼하게 그 내용들을 적어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소책자 [전시의 인민]이 출판되었다. 폭탄, 엉킨 철조망, 질식시키는 독가스, 권력자들의 치사스러움 등이 오랜 시간에 걸쳐 수백만 농민의 의식을 형성했다. 또한 인민의 뼈와 함께 낡아빠진 편견들도 삐걱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 소책자는 잘 묘사하고 있다. 병사들이 직접 생각해낸 수많은 표어들 속에 임박한 혁명의 구호들이 이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916년 12월 루즈키 장군은 리가(Riga)지구는 북부전선의 불행이라고 불평했다. 이곳은 “드빈스크와 마찬가지로 혁명에 대한 선전활동이 벌집처럼 활발한 곳이다.” 브루쉴로프 장군은 이 점을 확인시켰다: “리가 지구로부터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한 채 도착하고 있다; 병사들은 공격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한 중대장을 총검 끝으로 들어올렸다. 여러 병사들을 총살시킬 필요가 있었다, 등등.” 장교들과 가까이 접촉했으며 전선을 방문했던 로지안코도 이렇게 인정했다: “혁명 발발 오래 전에 이미 군대의 최종적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 초기에 혁명 분자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흔적도 없이 군대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군대 내의 불만이 일반화되자 이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체포된 파업노동자들이 전선에 투입되면서 선동가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리고 전투의 패배와 전선에서의 후퇴로 인해 병사 대중은 이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느 비밀경찰 요원이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후방의 군대 그리고 특히 전방의 군대에는 봉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분자들이 가득하다. 이들 외에 다른 병사들도 형벌을 거부할 지도 모른다.” 뻬쩨르부르그주(州)의 헌병 사령부는 토지협회의 대표가 보낸 보고서를 토대로 1916년 10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군대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장교와 병사의 관계는 대단히 긴장되어 있으며 유혈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 도처에 탈영병이 수천 명씩 존재한다. 군대를 밀착하여 관찰한 사람은 누구든지 병사들이 전의를 완벽히 상실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이 보고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종류의 통신문들은 믿기 어렵지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역 복무 후 귀환하고 있는 의사들 다수가 이와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후방의 정서는 전방의 정서에 호응했다. 1916년 10월 입헌민주당 회의에서 대의원 다수는 이렇게 언급했다: “모든 계층 그리고 특히 농촌의 마을과 도시빈민들이” 전쟁의 승리에 대해 관심과 신념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1916년 10월 30일 보고서 요약문에서 경찰청장은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 있으며 무조건적인 조속한 평화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 의원, 경찰관, 장군, 토지협회 대표, 의사, 전직 헌병 등은 모두 혁명 때문에 군대가 애국심을 상실했다, 볼셰비키들이 확실한 전쟁의 승리를 도둑질해갔다고 주장한다.     

 

입헌민주당은 전쟁 승리를 노래하는 합창단의 의심의 여지없는 주역이었다. 1905년에 혁명과의 의심스러운 유대관계를 재빨리 청산한 자유주의는 이후 반혁명 시기 초기에 제국주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매사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의 지배권을 확실히 넘겨받으려면 봉건적 쓰레기가 일소되어야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는 성취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 자본가 계급이 세계시장의 최고 지위를 보장받으려면 왕정 및 귀족계급과 동맹해야한다. 세계적 차원의 재앙은 여러 곳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따라서 막상 재앙이 닥치자 가장 책임이 큰 당사자들조차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짜르의 대외정책에 영감을 제공한 자유주의는 이 재앙을 준비하는데 의심의 여지 없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1914년에 제 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터지자 러시아의 부르주아 지도자들은 이것을 자기들의 전쟁이라고 크게 환영했다. 이들로서는 이 반응은 당연했다. 1914년 7월 26일 의회의 엄숙한 회기 중 입헌민주당의 의원단 대표는 이렇게 발표했다: “전쟁과 관련하여 어떠한 조건이나 요구사항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을 정복하려는 확고한 결의를 제창할 뿐이다.” 다른 참전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온 국민의 일치단결은 공식 입장이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애국심 고취 행사가 열리고 있을 때 사회자 벤켄도르프 백작은 외교관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보라! 베를린에서 터질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그대들의 혁명이 여기에서 터지고 있다!” 프랑스 공사 빨레올로그는 설명했다: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하다.” 환상을 절대적으로 배격하는 것 같은 전쟁의 혹독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환상을 키우고 전파하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환상에서 깨어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이때 변호사이자 지주이면서 포용력이 있는 로디초프가 이렇게 외쳤다: “저런 바보들을 데리고 승리할 수 있다고 정말 믿습니까?” 이후 사건들은 바보들과 함께 해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증명했다.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승리에 대한 신념을 절반 이상 상실했다. 이들은 전쟁 패배의 대세를 이용하여 짜르의 측근파를 숙청하고 짜르와 협상을 강제하려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주요한 도구는 짜르 내각을 친독파로 몰고 이들이 독일과 단독평화조약을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1915년 봄 무기도 지급 받지 못한 러시아 병사들이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었다. 이때 동맹국들의 압력을 받아 정부는 군대의 개선을 위해 개인기업의 창의성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목적을 위해 소집된 특별회의에는 관료들과 영향력 있는 기업가들이 참석했다. 전쟁 초에 등장한 토지 및 자치도시 협회들, 1915년 봄에 설립된 군사-산업 위원회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버팀목이었다. 이런 조직들의 지지를 받은 러시아 의회(두마)는 부르주아 계급과 짜르를 좀더 자신감 있게 중재하도록 부추겨졌다.

그러나 이 광범위한 정치적 전망은 당시 중요한 문제들에 집중된 관심을 분산시키지 못하였다. 중앙저수지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특별회의로부터 수억 그리고 수 십억 루블에 이르는 돈이 산업에 물을 대주고 수없이 많은 욕구들을 채워주었다. 의회와 언론은 1914년과 1915년의 전쟁 이윤을 일부 공개했다. 리아부쉰스키 가문의 모스크바 직물회사는 75%, 트베르 회사는 111%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콜추긴 구리회사는 1천만 루블의 기초자본금에서 1천2백만 루블이 넘는 이윤을 챙겼다. 이 분야에서 애국심을 가진 자들은 후한 보상을 즉시에 누렸다.

시장에 대한 모든 종류의 투기와 도박은 광란의 수준에 육박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엄청난 이윤이 생성되었다. 수도에서는 빵과 연료가 부족했다. 그런데도 궁정 보석상 파베르제는 이렇게 장사가 잘된 적이 없다고 뻐겼다. 그리고 궁정의 시종부인 비루보바는 1915-1916년 겨울에 가장 훌륭한 가운들이 귀부인들을 장식했으며 가장 많은 다이아몬드가 구입되었다고 말한다. 후방의 영웅들, 합법적 도망병들, 전선에 있기에는 너무 늙었으나 삶의 쾌락을 누리기에는 충분히 젊은 품위 있는 인간들로 나이트클럽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재앙이 닥쳤지만 대공들도 이들과 함께 노는 일에는 뒤지지 않았다.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것을 무서워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하늘에서 금이 소낙비처럼 계속 쏟아져 내렸다. “상류사회”는 손과 주머니를 내밀었다. 귀족부인들은 치마를 높이 펼쳤다. 모두 핏빛 진흙탕 속에서 철썩거리고 돌아다녔다. 은행가, 장관, 실업가, 짜르와 대공이 총애하는 발레리나, 정교회의 주교와 대주교, 궁정 시종부인, 자유주의 의원, 전선과 후방의 장군, 급진파 변호사, 저명한 관리, 수많은 조카와 특히 조카딸 등 모두가 한통속으로 돈과 향락을 움켜쥐고 집어삼켰다. 축복 받은 황금 소나기가 멈출 것을 두려워하듯 모두들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때도 되지 않은 평화조약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이들은 모두 열을 냈다.

공통의 이익, 겉으로 드러난 전쟁의 패배, 국내 정치의 불안정이 내포하는 위험성 등이 지배계급의 파벌들을 단결시켰다. 전쟁 전야에 분열되었던 의회는 1915년 애국심으로 단결한 후 야당을 결성하여 “진보 동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동맹의 공식 목적은 “전쟁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당연히 선언되었다. 좌익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트루도비키(역자 주: 지주에 대항하여 농민의 이익을 옹호한 정당. 그러나 소심한 인민주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이 정당은 자본주의의 철폐를 주창하지는 않았다. 케렌스키가 의회 의원으로 있을 때 소속된 정당이었다.), 우익에서는 흑백인조가 이 동맹에 불참했다. 이들을 제외한 의회 내 모든 정파들 즉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당의 세 그룹, 중앙파, 민족당의 일부 등이 이 동맹에 참여하거나 지지를 표명했다.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회교도인, 유태인 등 민족주의 정파들도 여기에 참여했다. 국민에게 책임지는 내각을 수립하라는 요구로 짜르를 경악시키지 않기 위해 이 동맹은 “국민의 신뢰를 누리는 정치인으로 구성된 단합된 정부”를 요구했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쉐르바토프공은 진보 동맹을 “사회혁명의 위험에 직면하여 결성된 일시적 정치연합”이라고 묘사했다. 이 점을 인식하는 데에는 대단한 통찰력이 요구되지 않았다. 입헌민주당 따라서 야당연합의 지도자 밀류코프는 입헌민주당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화산 위를 걸어가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긴장은 극단적인 수위에 도달했다.... 무심코 던진 성냥이 끔찍한 대형 화재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정부가 좋든 나쁘든 어느 때보다도 지금은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

전쟁 패배의 부담을 안은 짜르가 양보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희망은 너무 컸다. 따라서 8월에 자유주의 신문에는 “국민의 신뢰를 얻는 내각”의 예상 명단이 실렸다. 이 명단에 따르면 의회 의장 로지안코는 수상(다른 신문에는 토지협회 회장 르보프공이 수상이었다), 구츠코프는 내무장관, 밀류코프는 외무장관이었다. 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 이들은 짜르와 정치연합을 체결하기 위해 자신들을 내각에 입각시켰다. 이들 대부분 1년 후 “혁명정부”의 각료로 등장한다. 역사는 두 번 이상 이렇게 기이한 짓을 해왔다. 다만 이번의 경우 역사의 기이한 행위는 너무나 수명이 짧았다.

짜르가 임명한 고레미킨 내각의 장관들 대다수는 입헌민주당 만큼이나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진보 동맹과의 합의를 선호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최고통치자, 군대, 자치도시, 도의회(젬스트보), 귀족, 상인, 노동자 등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정부는 제대로 역할을 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이런 정부는 명백히 언어도단이다.” 쉐르바토프공은 1915년 8월 자신이 내무장관으로 있던 내각을 이렇게 평가했다. 외무장관 사조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무대장치를 제대로 하더라도 한군데 빈틈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러면 입헌민주당이 맨 먼저 타협안을 들고나올 것이다. 밀류코프는 부르주아 가운데 아마 가장 위대한 인물이고 사회혁명을 무엇보다 두려워한다. 이외에도 입헌민주당원 대다수는 혁명으로 자기 자본이 날아갈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밀류코프 자신은 진보 동맹이 “어느 정도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양측은 협상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으며 모든 것이 철저히 기름칠이 된 것처럼 보였다. 고레미킨 수상은 오랜 세월과 훈장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철저히 저자세를 고수하는 관료였다. 그는 대단한 참을성을 제 1 책략으로 하고 전쟁은 “나의 임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불평들에 대해 자신을 방어하는 제 2 책략을 가진 늙은 냉소주의자였다. 그는 8월 29일 전쟁 사령부로 짜르를 알현하였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 위치를 찾아야 하며 시끄러운 의회는 9월 3일 해산될 것이라는 내용의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짜르의 의회 해산 포고령이 낭독되자 누구 하나 항의하지 않았다. 의원들은 짜르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짜르 정부는 스스로 고백했듯이 어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의회를 해산시킨 후 1년 반을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러시아 군대의 일시적인 승리가 당연히 정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유리한 정세는 황금 소나기로 강화되었다. 물론 전선의 승리는 곧 패배로 바뀌었지만 후방의 이윤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이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는 점이 짜르 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었다. 모스크바 비밀경찰국장은 “전쟁이 끝난 후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이 우경화 했다고 보고했다. 전쟁 중에는 혁명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군사산업위원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던진 추파”에 대해 자본가들은 무엇보다도 놀랐다.  헌병 대령 마르티노프는 맑스주의 문헌들을 전문적으로 읽어서 뭔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정세가 유리하게 일부 개선된 이유가 “사회계급들의 꾸준한 분화 때문이다. 이것이 계급간의 날카로운 이해관계의 모순을 은폐했다. 이 모순은 특히 지금 강하게 느껴진다.”라고 일반적인 결론을 내렸다.

1915년 9월 짜르의 의회 해산 조치는 노동자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게 던져진 단도직입적인 도전장이었다. 이때 자유주의 의원들은 별로 열성적이지 않은 “짜르 만세”를 외치며 항의 한번 하지 않고 스스로 해산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노동자들은 이 조치에 항의하여 파업에 돌입했다. 이것은 썰렁한 자유주의자들을 더욱 썰렁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짜르의 가족회의에 초대받지 않은 제 3자가 끼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면 짜르에게 만세를 부르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좌익으로부터 약한 불평을 들은 후 자유주의자들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합법적 영역에만 머물고 애국적 의무만 달성하여 짜르 관료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어쨌든 새로운 내각 명단은 당분간 한쪽에 조용히 모셔놓아야 했다.

당시 정세는 자동적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1916년 5월 의회는 다시 소집되었다. 그러나 소집의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의회는 혁명을 촉구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회기를 통해 달리 말할 것도 없었다. 로지안코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회기는 힘없이 진행되었다. 의원들은 등원하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 계속적인 투쟁은 아무 소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는 아무 것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부정부패는 증대하고 있었다. 나라는 붕괴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혁명 외에 이 계급이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 때문에 1916년 짜르는 자기가 사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전쟁이 전혀 가망이 없음이 모두에게 명백해졌다. 대중의 분노는 어느 순간에든 터져 올라올 것 같았다. 지난번과 같이 짜르 정부를 친독파라고 공격한 후 독자적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할 방안을 모색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했다. 진보 동맹의 지도자 프로토포포프 의원은 1916년 가을 스톡홀름에서 독일 외교관 바부르크와 협상에 들어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유주의자들의 의중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의회 의원단은 프랑스와 영국을 친선 방문했다. 동맹국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후진국 러시아를 주요한 경제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동맹국들은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진을 전부 짜내려 했다. 동맹국들의 의중을 자유주의 의원들은 너무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연합국들이 승리하는 동시에 러시아가 패배한다면 러시아는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유산 지배계급은 연합국들과의 너무 가까운 관계를 피하고 독일과의 독자 평화조약 체결을 모색하여 구국의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적대관계를 이용해야했다. 프로토포포프와 바부르크의 회담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이 회담은 연합국들에게 위협을 가해 양보조치들을 끌어내려는 포석과 독일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포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프로토포포프는 짜르의 외교관들과 합의하여 행동에 나섰다. 이 회담은 스웨덴 주재 러시아 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이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의회 의원단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부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은 이 정찰 행위를 통해 꽤 중요한 국내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들은 짜르에게 암시를 보냈다: “우리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슈튀르머(역자 주: 1916년 1월부터 11월까지 짜르 내각의 수상)보다 더 조건도 좋고 믿을만한 단독 평화조약을 이끌어내겠습니다.” 프로토포포프 즉 그를 밀고 있는 세력의 구상은 단순했다: 러시아 정부는 동맹국들에게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으며 만약 동맹국들이 평화협상을 거부한다면 러시아 자신이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다고 “몇 달 전에 미리” 통보한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 스스로 작성한 자백서에서 프로토포포프는 당연히 이렇게 밝혔다: “러시아의 모든 합리적인 사람들 그리고 이들 중 ‘인민자유’당(입헌민주당)의 모든 지도자들도 러시아가 계속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프로토포포프는 협상을 끝내고 귀국한 후 자초지종을 짜르에게 보고했다. 짜르는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에 완전히 공감했다. 다만 그는 자유주의자들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프로토포포프는 진보 동맹과 결별한 후 짜르 친위 세력의 일원이 되었다. 이 멋쟁이 양반은 짜르와 왕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행보를 취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아마 내무장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자유주의 진영을 배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토포포프의 배신적 행위는 탐욕, 비겁함, 배신을 특징으로 한 자유주의 대외정책의 일반적 성격을 확인시켰을 뿐이었다.

11월 1일 의회는 다시 소집되었다. 국내 정세는 참을 수 없는 긴장상태에 도달했다. 의회가 중대한 조치를 발표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뭔가 행동이 필요했다. 아니면 최소한 뭔가 말하는 것이 필요했다. 진보 동맹은 의회에서 짜르의 실정을 폭로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의사당 의석에서 정부의 주요 조치들을 평가한 후 밀류코프는 조치 하나 하나가 발표될 때마다 이렇게 물었다: “정부의 조치들은 어리석음의 소산인가 아니면 일부러 나라를 망치려는 국가반역 행위인가?” 다른 의원들도 정부의 정책에 거세게 항의했다. 정부의 조치를 옹호하는 의원은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늘 그렇듯이 이렇게 응답했다: 의원들의 연설은 공개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연설문들은 백만 부 규모로 복사되어 널리 읽혀졌다. 후방 전방 할 것 없이 모든 정부 부서에는 금지된 연설문 복사판이 나돌았다. 그리고 연설문을 복사한 사람에 따라 빈번하게 내용이 덧붙여졌다. 11월 1일 의회의 토론 내용은 전국적으로 그 반향이 너무 커서 연설 당사자들은 후환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1905년 혁명을 진압한 두르노보의 영감을 받은 강인한 극우 관료 일개 그룹이 이 순간을 이용하여 짜르에게 특별조치를 청원했다. 이 경험이 풍부한 관리들은 진지한 경찰학교에서 훈련받았기 때문에 정세를 멀리까지 내다볼 줄 알았다. 그리고 이들이 청원한 조치들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면 그것은 구체제의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청원자들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야당에게 추호도 양보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흑백인조 극우분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너무 멀리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직에 있는 이 반동들은 흑백인조들의 저속한 생각을 경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너무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으며 솔직히 말해 너무 별 볼일 없는 인간들이다. 이들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불안한 것”이 문제였다. 이 반동들의 지적에 의하면 주요 야당인 “입헌민주당”의 허약함은 그 이름에 표현되어 있다. 즉 이 정당의 정치 핵심은 부르주아적인데 이름에는 민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상당한 정도 자유주의 지주들의 정당이기도 하지만 이 정당은 짜르 정부의 의무적 토지보상제(역자 주: 1861년 농노해방령에 의해 농민들에게 일정량의 토지가 유상으로 분배되었다.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소유했던 지주들은 국가로부터 금전적인 보상을 받았다.)에 서명했다. 짜르의 친위부대인 이들 비밀 고문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상징을 사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의 카드 한 벌에서 빼낸 트럼프 카드가 아니었다면(즉 짜르의 권위주의 정책이 아니었다면) 입헌민주당은 자유주의 변호사, 교수, 정부의 관리들로 구성된 다수 회원의 협회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가는 이와 다르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이들은 혁명정당들의 의의를 인정하되 분노로 이를 갈면서 인정한다: “혁명 정당들의 위험성과 힘은 이들이 사상, 돈(!), 잘 준비된 조직 대중을 보유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다.” 혁명정당들은 “농민의 압도적 다수의 공감을 기대할 수 있다. 농민은 혁명 지도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토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로 그 순간 노동계급을 뒤따를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국민에게 책임지는 내각은 어떤 정책을 취할 것인가? “우익 정당들이 완전하게 파괴될 것이다. 처음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중간 정당들(중앙당, 자유보수당, 10월당, 입헌민주당의 진보분파)은 서서히 영향력을 잠식당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운명이 입헌민주당을 위협할 것이다... 그리고 혁명 군중, 꼬뮌, 짜르 왕조의 멸망, 대대적으로 학살되는 유산계급에 뒤이어 마지막으로 농민 산적대가 등장할 것이다.” 여기서 경찰의 분노는 일종의 역사적 비전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정책의 적극적인 부분은 과거부터 일관되게 존재해왔던 것으로 새로운 내용은 전혀 없었다: 짜르 전제를 가차없이 옹호하는 정부의 수립, 의회의 철폐, 두 수도에 대한 계엄령 선포, 반란 진압군의 편성. 이 정책의 핵심들은 혁명 직전 마지막 몇 달간 정부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두르노보가 1905년 겨울에 휘두른 권력을 전제로 했을 때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권력은 1917년 가을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현실을 인식하여 짜르 체제는 몰래 그리고 부분으로 나누어서 인민의 목을 졸라 죽이려했다. 무조건 짜르와 왕후에게 충성을 바치는 “우리 사람들”로 장관들이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특히 배신자 프로토포포프의 경우 하찮은 인간들에 지나지 않았다. 의회는 철폐되지 않았으나 다시 해산되었다. 뻬쩨르부르그에 대한 계엄령은 유보되어 결국 혁명은 승리했다. 그리고 반란 진압군 자체가 반란에 가담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2개월 또는 3개월 후에 명백해졌다.

이때 자유주의 진영은 상황을 구출하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쏟고 있었다. 참정권을 누리는 부르주아 계급의 모든 조직들은 야당의 11월 의회 연설들을 일련의 새로운 선언문을 통해 지지했다. 이 선언문 가운데 가장 무례한 것은 12월 9일자 자치도시연합의 결의문이었다: “무책임한 범죄자들과 광신도들이 러시아의 패배, 치욕, 그리고 노예화를 준비하고 있다.” 의회는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부가 구성될 때까지 해산하지 말 것”이 촉구되었다. 심지어는 관료집단과 엄청난 재산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국무회의조차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인사들이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족연합조차 이와 비슷한 내용을 촉구했다. 즉 이끼가 잔뜩 낀 돌들도 정부 정책을 반대하며 아우성을 부린 셈이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짜르는 권력의 마지막 남은 쪼가리들을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주저와 지연 끝에 마지막 의회의 마지막 회기가 1917년 2월 14일에 소집되었다. 혁명 발발 2주일 전이었다. 시위가 예상되었다. 입헌민주당의 기관지 [레치](역자 주: 연설이라는 의미이다)는 시위를 금지하는 뻬쩨르부르그 군단장 하발로프 장군의 담화문과 “암흑 세력”의 “위험하고 나쁜 충고”를 노동자들에게 경고하는 밀류코프의 편지를 실었다. 파업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평화스러운 분위기에서 개원했다. 권력의 문제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체하면서 의회는 중요한 그러나 여전히 실무적인 식량 공급 문제에 몰두했다. 로지안코가 나중에 회상했듯이 분위기는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의회의 무력감과 아무 소득 없는 투쟁에 대한 피로감을 동시에 느꼈다.” 진보 동맹이 “말로 그리고 오직 말로만 행동할 것”이라고 밀류코프는 계속 반복했다. 2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의회는 이런 상태였다.

 

제 3장 노동계급과 농민

러시아 노동계급은 전제국가의 정치환경 속에서 정치투쟁의 걸음마를 배웠다. 불법파업, 지하 서클, 불법성명서, 거리 시위, 경찰 및 군대와의 대치 등이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훈련시켰다. 급격히 발전하고 있던 자본주의와 천천히 진지들을 내주고 있는 절대주의가 합동으로 노동자 정치학교를 세워주었다. 거대기업에 의한 노동자의 집중, 격심한 국가탄압, 젊고 패기 넘치는 노동계급의 추진력 등으로 서구에서 대단히 희귀한 정치파업이 러시아에서는 노동자 투쟁의 기본 메뉴가 되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파업 통계는 러시아 정치사의 매우 인상적인 지표이다. 책의 내용을 통계수치로 도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03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에서 발생한 정치파업 통계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단순하게 상황을 드러내는 이 통계는 공장감독 대상기업만 조사대상으로 하고 있다. 농업은 물론이고 철도, 광산, 기계 및 일반 영세기업들은 여러 이유로 인해 통계 대상에서 빠져있다. 그러나 이 결함에도 불구하고 시기별 파업빈도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변화가 뚜렷하다.

러시아는 자궁 속에 거대한 혁명이 들어앉아 있는 나라이다. 이 나라의 정치 체온을 잴 수 있는 유일한 그래프가 눈앞에 드러난다. 공장감독 대상기업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수는 1905년에는 1백5십만, 1917년에는 2백만이었다. 노동계급의 비중이 이렇게 적은 후진국에서 파업운동은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폭발력을 보인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허약성, 농민운동의 분산성 및 맹목성 때문에 노동계급의 혁명파업은 막 깨어나고 있는 인민이 절대주의 갑옷에 내려치는 철퇴가 된다. 여러 번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를 두 번 파업에 참가한 것으로 계산하면 1905년 정치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1백84만3천명이다. 러시아의 정치 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 수치를 통해 혁명이 발발한 해를 알 수 있다.

연도        정치파업 참여 노동자 수(단위: 1천명)

1903 ..... 87

1904 ..... 25

1905 ..... 1,843

1906 ..... 651

1907 ..... 540

1908 ..... 93

1909 ..... 8

1910 ..... 4

1911 ..... 8

1912 ..... 550

1913 ..... 502

1914(첫6개월) ..... 1,059

1915 ..... 156

1916 ..... 310

1917(1월과 2월) ..... 575

(저자 주: 1903년과 1904년의 경우는 모든 파업을 의미한다. 당연히 경제파업이 지배적이었다.)

공장감독 기록에 의하면 러일전쟁의 첫해인 1904년에는 전부 합해 겨우 2만5천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1905년에는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을 합쳐 2백86만3천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전년에 비해 무려 115배나 많은 수치이다. 이 놀라운 사실 자체는 이렇게 제안한다: 노동계급은 정세의 흐름에 따라 즉흥적으로 그리고 유례없는 혁명활동을 전개할 동력을 가진 계급이다; 이 계급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대오 내에서 투쟁과 거대한 임무의 차원에 적합한 조직을 만들어낸다. 이 조직이 바로 소비에트였다. 소비에트는 1905년 첫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탄생하여 총파업과 국가권력 장악의 기관이 되었다.

1905년 12월 봉기에서 패배한 후 노동계급은 다음 2년간 투쟁의 성과를 방어하는 영웅적인 투쟁을 벌인다. 이 2년은 파업통계가 말해 주듯이 혁명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간이지만 혁명의 퇴조기였다. 파업통계에 의하면 1908년부터 1911년까지는 반혁명이 승리한 시기이다. 반혁명의 승리와 함께 들이닥친 경제위기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노동계급을 탈진상태에 빠뜨린다. 추락의 깊이는 상승의 높이와 대칭을 이룬다. 러시아 사회의 격동은 이 단순한 수치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0년에 시작된 경기호황은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이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의 통계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의 통계를 거의 되풀이하고 있으나 흐름은 정반대이다.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곡선이 움직이고 있다. 이제 노동자의 수도 늘어나고 투쟁경험도 쌓였다. 이 새로운 그리고 더 높은 역사의 기초 위에 새로운 혁명공세가 시작된다. 1914년 첫 6개월간의 정치파업 수치는 1905년 혁명 절정기에 기록된 수치에 접근한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로 이 과정은 급격히 교란된다. 전쟁 첫 몇 개월간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전쟁 선동에 이렇다할 정치적 대처를 하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진다. 그러나 1915년 봄이 되면 이 증상은 과거지사가 된다. 정치파업의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고 이 순환은 1917년 2월 병사와 노동자의 봉기로 절정에 이른다.

대중투쟁의 급격한 하강과 상승 때문에 몇 년이 지난 후 러시아 노동계급은 이전과는 전혀 달라져서 거의 알아볼 수가 없다. 2, 3년 전 만해도 단 한 건의 자의적인 경찰 공격에 대해서도 만장일치로 파업에 돌입하던 공장들이 지금은 완전히 혁명의 색깔을 상실하고 저항 한번 없이 가장 극악한 범죄행위도 참아 넘긴다. 거대한 패배는 상당한 기간 무기력을 초래한다. 의식적인 혁명분자들은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아직도 전부 없어지지 않은 편견과 미신이 다시 살아난다. 이 시기에 농촌 마을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회색 빛 인구가 노동계급의 대오를 희석시킨다. 이때 회의주의자들은 혁명의 불가능성을 확신하며 고개를 젓는다. 회의가 확신으로 변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의 시기가 바로 이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은 패배의 심리적 상처를 극복한다. 새로운 정세 또는 새로운 경기의 흐름이 새로운 정치투쟁의 순환을 개시한다. 혁명분자들은 다시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중을 만난다. 이제 투쟁은 더 높은 차원에서 다시 시작된다.

멘셰비키주의는 혁명의 퇴조기와 반동기에 그 모습을 완성했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두 으뜸가는 정치경향을 이해하려면 이 사실을 유념해야한다. 이 경향은 혁명과 결별한 노동자의 얇은 부위를 주요 정치기반으로 삼았다. 반면에 볼셰비키주의는 반동기에 잔인하게 분쇄된 후 전쟁이 터지기 전 몇 해 동안 새로운 혁명의 파도 위로 급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쉬지 않는 투쟁, 저항, 계속적인 조직활동을 수행할 준비가 된 가장 열성적이며 대담한 분자는 바로 레닌 주위로 결집된 분자, 조직, 인물들이다.” 러시아 경찰청은 이렇게 말하면서 전쟁 전 몇 년간의 볼셰비키 혁명 활동을 개략적으로 묘사했다.

1914년 7월 외교관들이 유럽을 십자가에 매달고 마지막 못을 박아 전쟁의 재앙을 준비하고 있을 때 뻬쩨르부르그는 혁명의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프랑스의 대통령 뿌엥까레는 가두투쟁의 마지막 메아리와 애국주의 시위의 첫 웅성거림이 들리는 가운데 알렉산드르 3세의 무덤에 화환을 증정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1912년에서 1914년까지의 대중적 정치공세가 곧바로 짜르 체제의 전복을 가져왔을까?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불가피하게 혁명은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단계들을 거치면서 혁명이 진행되었을까? 혁명이 또 패배하지는 않았을까? 농민을 투쟁으로 인도하고 군대의 공감을 획득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이런 방향들로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어쨌든 전쟁은 처음에 투쟁을 후퇴시켰다. 그러나 다음 시기에 더욱 강력하게 투쟁을 추진시켜 압도적인 승리를 가능케 했다.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북소리에 혁명운동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투쟁에 좀더 적극적인 노동자들이 전선으